곱닥한 제주 마을
- 공동체 정신이 살아 숨쉬는 마을,
신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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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시내에서 동쪽으로 약 13km 거리에 있는 조천읍 신촌리는 서쪽으로는 삼양동과 만나는 원당봉에서 시작하고 동쪽으로는 조천읍 조천리와 경계가 되는 대섬까지 이어진다. 신촌의 옛 이름은 ‘숫군, 숙군’이다. 지금보다 조금 위쪽에 자리했던 당초의 마을은 식수가 모자라서 큰물을 찾아 바닷가로 내려오게 되었고 이때 ‘새로운 마을’이 생겼다는 의미에서 신촌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글, 사진 김윤정 여행작가
홈제주 공감곱닥한 제주 마을 (아름다운 제주 마을)
아름다운 연꽃을 품은 습지 생태공원,남생이못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하늘빛이 평화롭다. 햇살은 따사롭다. 갈바람이 짙어지기 전 갯가 길을 사뿐사뿐 걷고 싶다.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 날 헐거워진 신발 끈을 동여맨다. 제주 시내에서 동쪽으로 약 13km 거리에 있는 조천읍 신촌리로 향한다.
신촌리는 주민들이 서로 도와 남생이못을 만들고 조천중학교를 짓는 등 애향심과 공동체 정신이 각별한 마을로 널리 알려졌다. 마을의 첫 관문인 진드르를 중심으로 수박 산지와 화훼 단지로도 유명하다. 원당봉을 지나자 일주도로 양쪽으로 진드르가 펼쳐진다. 답답한 마음이 확 트여온다. 신촌리 경작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진드르는 ‘긴 들판’이란 의미의 제주어다. 제주에서는 드물게 넓은 평야지대인 진드르는 일제강점기 때 제주동비행장 터를 닦기 위해 도민들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쭉 뻗은 진드르를 지나 갯가를 향해 간다. 물 위로 연꽃이 부드럽게 흔들거린다. 남생이못이다. 잠시 길을 멈춘다. 남생이못은 신촌리 마을의 공동체 정신을 대표하는 사례로 꼽힌다. 80여 년 전 신촌리 서삼동 청년들은 수신계를 만들고 석유 등을 판매해 모은 이익금으로 밭을 사서 연못을 만들었다. 남생이못은 물이 부족한 농경지의 농업용수와 간이 목욕장으로 사용되었고 소와 말의 음용수로도 활용됐다. 제주의 해안가 습지 중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남생이못은 쉬엄쉬엄 걸으며 산책하기 좋은 습지 생태공원이다. 이곳에는 노란 어리연, 수련 등 다양한 수생 식물이 자라고 어류와 곤충들을 비롯해 여러 습지 동물들이 함께 살아간다. 청초한 노란 어리연꽃이 연못을 가득 메웠다. 한편에는 고운 자태를 뽐내는 수련의 모습도 보인다. 손을 건네면 닿을 듯 말 듯 꽃들이 요정처럼 웃고 있다.
↑남생이못 수련
↑남생이못 어리연꽃
제주의 돌 문화 유적,신촌리 환해장성과 갯담
남생이못 서쪽에 있는 신촌조규훈선생현창비 앞에 선다. 신촌리 출신 조규훈 선생은 일본에서 1949년 민족교육기관인 백두학원을 설립해 재일 동포 젊은이들을 위한 배움의 장을 마련했다. 신촌리 주민들은 조규훈 선생을 중심으로 힘을 모아 조천중학교를 세웠다. 학교를 짓기 위해 당시 일본에서 목재를 실은 큰 배를 보냈으나 물이 얕은 신촌 포구에 접안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큰물 앞바다에 목재를 띄우면 청년들이 헤엄쳐 포구까지 옮기고 주민들이 달구지로 날라서 학교를 지었다고 한다. 학교 건립 과정 자체가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 정신을 잘 보여준다.
닭머루를 지나 갯가로 향한다. 바람을 타고 바다향이 번져온다. 서원동 바다 앞에 신촌리 환해장성이 보인다. 제주는 사면이 바다여서 적이 침입하기 쉽다. 이를 방비하기 위해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바닷가에 접안이 가능한 곳은 돌로 성을 쌓았는데 바로 환해장성이다.
바닷물을 둘러싸고 있는 갯담(원담)도 보인다. 갯담은 제주 바다의 자연지형과 썰물과 밀물의 조차를 이용해서 만든 제주 고유 어로시설이다. 갯담은 마을 공동 소유로 쌓고 보수하는 일을 주민들이 함께 했다. 주로 여름철 멜(멸치)잡이에 이용됐다.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간다. 파도가 하얀 포말을 그린다.
신촌 포구에 솟아나는 생명수,용천수 큰물
경쾌한 물소리가 들린다. 신촌리 서원동과 서하동의 경계를 마주하며 용천수 수물과 안갯물이 흐르고 있다. 수물은 남탕이고 안갯물은 여탕이다. 인기척이 느껴진다. 수물 안을 들여다보니 주민 한 분이 있다.
“여기 물은 아직도 진짜 맑구나예” “신촌리 물은 옛날에는 더 깨끗해수다. 내가 어릴 때는 여기서 여름이면 맨날 목욕도 하고 친구들이랑 놀아수다. 저쪽에 안갯물은 더 넓고 좋으난 꼭 봥 갑서”
안갯물을 보지 않고 가면 왠지 섭섭할 거 같은 기분이 든다. 포구로 가던 발길을 잠시 멈춘다. 안갯물 안으로 들어간다. 리듬을 타는 맑은 물소리에 정신없이 빠져든다. 몸과 마음이 기지개를 켠 듯 개운하다. ‘정말 좋다’ 속으로 외친다. 돌담길을 쭉 걸어 나오니 신촌 포구다. 동네 소년들이 신나게 자전거를 타고 있다. 무엇이 저리도 좋은 걸까?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다 큰물을 찾아 나선다. 용천수 큰물은 물의 양이 많고 일 년 내내 마르지 않아 큰물로 불렸다. 오랜 세월 마을을 지켜낸 생명수다. 큰물에서 목욕을 하면 평생 건강하고 장수한다는 말이 전한다. 다리 위에 선다. 포구에 접한 큰물을 바라본다. 조용한 바다와 어우러져 펼쳐진 나지막한 풍경들이 정겹다.
제주 초가와 와가를 함께 볼 수 있는 곳,조군현 가옥
큰물 서쪽에 남당물이 있다. 남당물까지 찬찬히 둘러보고 포구를 빠져나온다. 갯가를 벗어나 마을 안 길을 따라 걷는다. 옛 정서가 그대로 살아있는 마을 안은 좁은 돌담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삼촌이 뒷짐을 진 채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잰걸음으로 다가가 조군현 가옥으로 가는 방향을 묻는다.
조군현 가옥은 제주도 민속문화재로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제주 민가다. 안거리인 와가와 밖거리인 초가가 한 마당 안에 있다. 예부터 제주인은 부모와 자식 세대가 한 울타리 안팎 거리에 서로 의지해 살면서도 경제적으로는 독립적으로 생활했다. 자원이 부족했던 척박한 땅에서 같이, 그러면서도 각각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안거리 밖거리는 늙어서도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제주 사람들의 강인한 생활력이 반영된 독특한 가옥 형태다.
올레 끝에 초가지붕이 보인다. 반가워 대문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문이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다. 까치발을 해보지만 담장이 너무 높다. 대문 안을 들여다본다. 와가 지붕이 살짝 보인다. 다음을 기약해 보지만 마음은 너무 아쉽다.
↑와가 지붕이 눈에 띄는 조군현 가옥
↑제주도 민속문화재 조군현 가옥
농어촌 마을의 정취와 애향심이 느껴지는신촌리 마을
마음이 동수동으로 달려간다. 동수동은 신촌리 여러 자연부락과 달리 바닷가와 멀리 떨어져 있다. 1911년 일제 강점기, 동수동은 항일과 조선의 가치관을 계승하고 올바른 공동체의 삶을 이루려는 뜻을 가지고 다섯 가구가 모여 살면서 형성됐다. 풍채 좋은 팽나무가 쉼터에 우뚝 서 있다. 노랗게 익은 감귤이 과수원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풍성하게 자란 우영팟(텃밭) 채소들이 먹음직스럽다.
영금과 수확, 가을이 완연하다. 이 계절 누구와 함께 걸어도 좋다. 농어촌 마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고 고향을 사랑하는 애향심이 깊이 느껴지는 마을, 조천읍 신촌리 마을이다.
↑동수동의 팽나무
↑동수동의 우영팟 채소
삼다 제주와 함께하는 즐거운 이야기, 삼다소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