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머리에 인 한라산 밑자락이 탁 트인 바다를 향해 널찍하게 펼쳐진다. 봉긋한 오름과 여유로운 들판, 그리고 바닷가를 따라 마을이 이어진다. 성채처럼 우뚝 솟은 성산일출봉에서 바다와 육지로 갈라지는 그곳에 시흥리와 오조리, 수산리가 있다. 시흥리(始興里)는 이름 그대로 시작의 의미가 있다. 지금은 남쪽의 서귀포시와 북쪽의 제주시의 동쪽 경계에 자리 잡은 마을이지만, 예전에는 북제주군의 끝 마을인 ‘종달리(終達里)’와 맞닿아 있고 남제주군의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은 우도와 성산일출봉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두산봉을 포함한 올레1코스가 있어 그 의미를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시흥리는 물이 풍부한 지역이지만 용천수의 자취는 많이 남아있지 않다. 주민들이 만들고 이용하던 물통은 상수로가 생기면서 쓰지 않게 됐고, 사유지에 속하거나 자연경관지역으로 지정되면서 하나둘 사라져갔다. 특히 물이 많고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던 물통은 주로 마을의 중심지나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에 있어 더욱 빨리 사라졌다. 그래서 시흥리에는 현재 큰물, 돈물 정도가 남아 있다.
시흥리를 대표하는 용천수인 큰물은 시흥초등학교 맞은편에 있는데, 현재 도로가 생기면서 남탕이 매립되고 여탕만 남아 있다. 큰물은 물이 콸콸 솟아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수량이 풍부했던 곳으로 시흥리 주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식수이자 좋은 물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큰물의 옛 모습을 기억하는 주민들은 한여름에도 차가워서 목욕을 오래 할 수 없었다고도 하고, 땀띠가 났을 때 이 물로 씻으면 싹 낫게 해주는 약물이었다고 자랑한다. 지금 남아 있는 여탕은 주위에 팽나무, 후박나무 등이 무성하게 자라 있어 물통자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물을 보며 큰물의 옛 자취를 짐작할 뿐이다.
큰물에서 바다 쪽으로 조금 내려가다 보면 돈물이 나타난다. 돈물은 풍성한 초목들 사이에 있어 마치 숲속의 샘처럼 보일 정도다. 지금도 수량이 풍부하고 물이 깨끗한 것이 한눈에 보이지만, 갈대밭과 울창한 나무들에 덮여 물통이라기보다는 습지처럼 보인다. 시흥리는 큰물과 돈물 말고도 워낙 물이 많이 솟아나는 지대라 옛날 비가 오면 길에 물이 넘쳐나 ‘물길을 걸으며 학교에 간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주민들의 안내가 없다면 물통을 찾기 힘들다.
수산리는 한라산 중산간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 바닷가 마을과 달리 물이 귀한 곳이다. 물이 풍부한 바닷가 마을은 물이 많이 필요한 논 농사도 지을 수 있었지만, 수산리처럼 중산간에 있는 마을은 식수도 부족해 물을 아껴써야 했고 가물면 물이 풍부한 오조리까지 마차를 끌고 가서 물을 길어오기도 했다고 한다. 몸을 씻거나 청소할 물도 모자라서 물 바가지 하나로 얼굴과 손, 발을 씻고 걸레까지 빨아 썼다고 한다.
며칠에 한 번 씻고 청소하는 일이 흔하니 알드르(바닷가마을) 사람들은 웃드르(중산간마을) 사람들의 더러운 행색을 보고 ‘웃드르 촌놈’이라고, 웃드르 사람들은 ‘알드르 갯것’이라고 흉을 봤다고 한다. 수산리 마을이 있는 해안가는 완만한 바닷가 지형 때문에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수산리에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수산진성이 있다.
그 안에 물통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매립되어서 찾을 수가 없다. 수산리는 물이 귀한 만큼 용천수의 흔적도 찾기 어렵다. 어르신들의 기억을 확인하고 물어물어 겨우 찾아낸 ‘캐물’이 유일하다. 특이한 점은 바위가 갈라져서 생긴 길다란 돌 틈새에서 물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딱 물허벅 하나만 들어갈 정도로 벌어져 있는 것도 신기하다. 수산리 어르신들은 캐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늘 물이 나오는 신통한 물이라고 자랑한다. 이 물을 긷기 위해서 여자들은 이른 새벽부터 집을 나서야 했다고 한다. 지금은 주변에 감귤과수원이 있어 담으로 잘 보호되고 있다.
식산봉 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마을인 오조리는 바다를 끼고 용천수가 발달해 있어 지금도 가는 곳마다 물통의 자취를 만날 수 있다. 해안도로를 따라 족지물, 샛통물 등을 만날 수 있는데 물때를 잘 맞춰서 가면 맑은 물이 찰랑거리는 아름다운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오조리를 대표하는 ‘족지물’은 식산봉을 돌아 오조리 마을 안으로 들어서는 해안가 길에 있다. 올레2코스이기도 한 이곳은 예로부터 물이 풍성해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족지물은 수량이 풍부해서 100호는 거뜬히 충당할 수 있는 물이 나왔다고 한다.
족지물은 발가락처럼 길게 뻗은 모양이라 붙인 이름이라고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주민들은 ‘발 담그는 물’이라고 해서 족지물이라고 부르고, 그 동네를 족지동이라고 불렀다. 족지물에 애정이 많은 주민들이 지극 정성으로 관리하고 있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지금도 복다리라는 작은 물고기와 왕강이(참게)가 눈에 띌 정도로 물이 맑고 깨끗하다. 진입로에는 널찍한 계단을 만들고, 주차공간과 정자, 화장실도 갖추고 있어 올레2코스를 걷는 올레꾼과 주민들이 잠깐 쉬었다 갈 수 있는 쉼터 역할도 하고 있다.
오조리 남쪽에 있는 ‘샛통물’도 그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오조리 남쪽을 ‘앞동네’라 불렀는데, 샛통물은 이 앞동네 사람들의 식수와 생활용수 역할을 했다. 여자 물통, 남자 물통, 우마용 물통으로 따로 구분되어 있고 물통에서 사용한 물은 논으로 흐르도록 연결해 농업용수로 썼다고 한다. 지금은 물이 조금 흐르는 흔적만 보이고 풀이 무성히 자라 있지만, 물통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잘 정비하면 마을 안길의 생태체험지가 될만한 곳이다.
오조리 탐방에는 용천수에 각별히 관심이 많은 어르신의 도움이 컸다. 어르신은 오조리 곳곳의 물통과 옛 모습을 기억하고 있어 용출지점을 찾기 어려운 바닷가 용천수 위치는 물론 당시의 이야기들까지 고스란히 전해주셨다. 지금은 용출지점도 찾기 어려운 곳이지만 오조리 해녀들이 이용하던 연디밋물을 알려주시며 노래 속 장소가 여기라고 함께 불러주신 노래가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우리 어멍 연디 밑 그 흔한 고메기도 그리다간 우리 어멍…” 제주물의 가치를 이어가려면 이분과 같은 어르신들의 기억을 모으는 일을 하루빨리 본격적으로 추진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