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제주에는 1000여 명이 넘는 유배인이 머물렀다. 조선 최고 위치인 왕부터 당대의 저명한 선비와 문화예술인, 종교인까지 멀고 험한 제주로 떠밀리듯 내려왔다. 그들은 제주에서 독서나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후학 양성에 힘쓰기도 했다. 제주민은 유배인을 통해 당대 깊은 지식과 문화를 습득하며 제주의 지적, 문화적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렇듯 유배인과 제주민의 소통은 지금까지도 제주 곳곳에 귀중한 자산으로 남아 있다.

↑ 광해군의 제주 기착지인 행원포구
조선 15대 임금인 광해군은 인조반정 뒤 폐위되어 1637년 제주로 유배된다. 당시 조정에서는 광해군의 유배지를 알리지 못하도록 했고, 바다를 건널 때는 배의 사방을 가려 밖을 보지 못하게 하는 등 제주 유배를 비밀리에 진행했다. 배에서 내려 제주도임을 알게된 광해군은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며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광해군은 제주성 안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뒤 나인 두 명과 함께 가시울타리에 갇혀 생활하다 유배 4년만인 1641년 7월 7일 사망했다. 광해군 적소 터는 현재 제주시 동문로의 기업은행 자리와 중앙로의 국민은행 제주지점 위치라 하며, 표석은 국민은행 제주지점 앞에 있다. 광해군은 연산군과 달리 성실하고 결단력 있게 정사를 펼쳤으나 당쟁으로 희생된 임금으로 평가되고 있다.
*위리안치(圍籬安置) 중죄인에 대한 유배형 중의 하나이다. 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귀양간 곳의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돌리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