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녀 혹은 해녀라고 부르는 이들은 산소공급장치와 같은 특별한 장치 없이 빗창, 갈고리, 정게호미와 같은 도구만 갖고 바다에 들어가는 나잠어법(裸潛漁法)으로 소라, 전복, 미역, 톳 등을 채취하며, 가끔 작살로 물고기를 잡는다.
이와 같은 물질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섭라(제주)에서 야명주(진주)를 진상하였다는 기록으로 남아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해녀의 역사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남자인 포작인(鮑作人)들이 전복을 채취해 진상해 온 것으로 나와 있으며 1629년 이건의 「제주풍토기」에 해녀들이 전복을 채취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해녀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이익태의 『지영록』, 위백규의 『존재전서』 등의 여러 문헌자료에 나타나고 있다. 한편 이형상의 『탐라순력도』 <병담병주>(1702년)에서는 지금의 용두암 부근에서 물질하고 있는 해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해녀들은 산소 마스크 없이 수심 10m까지 잠수하고, 한 번 잠수할 때마다 1분간 숨을 참으며 하루 최대 7시간까지 연간 90일 정도 물질을 한다. “저승의 돈 벌어 이승의 자식 먹여 살린다”는 속담은 해녀 물질의 위험함을 보여준다. 제주 여성 삶의 서글픔과 고달픔을 담은 “쇠로 못 나난 여자루 낫주(소로 못 태어나니까 여자로 태어났다)”란 말에서는 해녀로서 삶이 얼마나 고된지 알려준다. 일이 힘들고 위험하니 해녀들은 혼자가 아니라 단체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해녀는 물질 능력에 따라 상, 중, 하로 나뉜다. 깊은 바당(물질하기 적합한 바다) 물질은 상군이 떠맡고, 어린 해녀는 안전한 바당에서 작업하도록 했다. 할망바당을 따로 두어 늙은 해녀들의 생활도 배려했다.
상군 해녀들은 어린 해녀에게 미역을 한 주먹씩 나눠주는데, 이를 ‘게석’이라고 한다. 서로 도와서 고된 삶을 이겨내려는 마음이 담긴 풍습이다. 조업을 끝낸 해녀들은 불턱으로 향하는데 불턱은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바다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곳이며 작업 중 휴식하는 장소이다. 둥글게 돌담을 에워싼 형태로 가운데 불을 피워 몸을 덥혔다. 이곳에서 물질에 대한 지식, 물질 요령, 바다밭의 위치 파악 등 물질 작업에 대한 정보 및 기술을 전수하고 습득하며 해녀 간 상호협조를 재확인하고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제주도 해안에는 마을마다 3~4개씩의 불턱이 있었으며 현재도 70여 개의 불턱이 남아있다. 1985년을 전후하여 해녀보호 차원에서 마을마다 현대식 탈의장을 설치하였는데 개량 잠수복인 고무옷의 보급에 따라 온수목욕시설이 갖추어진 탈의장은 필수 시설이 되었으며 불턱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해녀의 노래는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1호, 제주해녀의 물옷과 물질 도구는 제주도 민속문화재 제10호, 제주해녀어업은 국가중요어업유산 제1호로 지정되었다. 해녀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32호가 되었고, 유네스코 역시 제주해녀 문화를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 목록으로 인정했다.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제주해녀문화’는 산소공급 장치 없이 바다애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물질문화와 공동체의 연대를 강화하며 해녀들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잠수굿, 물질을 나가는 배 위에서 부르는 해녀노래, 모녀 및 세대 간에 전승되는 여성의 역할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