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금빛의 유기그릇에 잔잔한 샛노란색 유채꽃이 소복히 담겼다. 때로는 유채꽃만 가득히, 때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유채꽃 폭포처럼 흐드러지게, 때로는 가득 담긴 유채꽃과 사람들, 한라산을 담았다. 금가루처럼 찬란히 빛나는 유채꽃 그림에서 따스한 봄바람과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행복했던 봄날의 추억, 따스한 그리움이 마음을 간질인다.
처음 시선을 붙잡는 유채꽃에서 은은한 금빛으로 빛나는 놋그릇에 시선이 머문다. 수천 번을 두드려 빚어낸다는 방짜유기, 오랜 시간과 정성의 흔적이 오롯이 담긴 방짜유기의 넉넉하고 여유로운 품이 유채꽃과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작가가 오랫동안 탐구해 온 ‘가장 한국적인 것’의 원형이다.
“우리나라 문화의 많은 부분들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왔지요.
하지만 청동기 문화는 스키타이 문화가 직접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이라 합니다.
그것이 방짜유기 같은 놋그릇으로 이어져오며 우리 민족의 삶과 정신이 담긴 귀한 문화유산이 된 것이죠.
그 의미를 작품으로 승화시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김순겸 작가는 ‘비록 방짜유기가 도자기처럼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그림으로 그 가치를 잘 표현해 대중에게 전달한다면 그에 대한 인식도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덧붙인다.
김순겸 작가의 작품세계는 놋그릇을 중심으로 크게 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0년 교직을 떠나 전업 미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며 ‘기억 너머-그리움’을 주제로 고향 제주를 떠나 생활하면서 켜켜이 쌓인 그리움을 담아내는 다양한 소재들이 그의 화폭에 담겼다. 풍경과 창문, 길, 목련 등의 소재가 주를 이뤘다.
그러던 어느 날, 장모님이 ‘그림 소품으로 써보라’고 주신 놋그릇이 그의 작품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사람의 손때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오래된 놋그릇, 그 투박하지만 생생한 아름다움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점점 그의 작품에서 다른 소재들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풍경을 걷어내고, 창문을 걷어내고, 길을 걷어내며 꽉 차 있던 화폭이 하나 둘 비워졌다. 마침내 놋그릇 하나만 남았다.
“채우는 건 어렵지 않지만 비우는 건 정말 어려워요.
사실주의 화가는 자신만의 소재를 만들어서
작품세계를 구축하는게 정말 중요해요.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죠.
기술 특허를 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될겁니다.
제가 이렇게 놋그릇이라는 소재를 얻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놋그릇이 작품의 중심에 자리잡고도 그의 시도는 멈추지 않았다. 흔히 쓰는 주물 놋그릇에서 보다 깊이 있는 방짜유기로 바꿔보고 거기에 그리움을 상징하는 목련을, 그리고 생명의 근원과 정화의 의미를 가진 물을 담았다. 하지만 어딘가 아쉬웠다. 작품은 더욱 깊어졌지만 작품을 보는 대중의 시선에는 선입견이 크게 개입했다. 그릇에 담긴 맑은 물 이미지는 가족의 평안을 빌며 정성을 들이는 정화수(정한수) 같다는 전통적인 관념이 작용한 것이다. 그때, 김순겸 작가가 떠올린 소재가 바로 ‘유채’였다.
“유채꽃을 택한 건 행복, 사랑 같은 긍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는 소재이기 때문이에요.
유채꽃 하면 봄, 신혼부부, 가족, 아이들 같은 행복한 추억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나요.
제주도를 상징하는 꽃이기도 하고요.
제 작품 주제 ‘기억 너머-그리움’을 표현할 수 있는 좋은 소재예요.”
제주 출신인 그에게 유채꽃은 더욱 각별한 고향의 추억일 터. 작가의 눈과 손길을 통해 작품으로 승화된 제주의 유채꽃은 그렇게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화사하게 피어났다.
전업 미술작가를 선언한 지 20여 년, 놋그릇을 만난 지 15년. 기나긴 시간이지만 김순겸 작가는 ‘이제야 작품세계가 안정됐다’고 말한다.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드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이렇게 작품에 대한 확신이 생긴 지난해, 김순겸 작가는 고향 제주로 돌아왔다. 지금은 조천읍에 집과 작업실을 마련하고 오롯이 작품활동에만 매진하고 있다. ‘작가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작품’이라는 신념으로 오래, 꿋꿋이 작품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라는 마음에서다. 하지만 고향 제주의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한 마디도 잊지 않는다.
“제주는 문화예술과 작가에 대한 의식이 높은 곳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작가가 성장할 수 있는 토양과 지원이 부족한 편이죠.
지역 문화예술이 자생할 수 있는 플랫폼 마련이 제주의 문화예술 성장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