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제주 애조로에서 번영로로 갈아타고 서귀포로 넘어갑니다. 그 옆에 많던 차들은 어느덧 한둘씩 사라지고 시원하게 뚫린 도로와 저 혼자만이 존재할 즈음, 성읍 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오늘의 목적지인 ‘가시리 마을’이 나옵니다. 가시리 마을은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서북부에 있는 중산간 마을로 해발 90m~570m 고도에 위치하고, 면적은 10㎢로 표선면 전체 면적의 41.4%를 차지할 정도로 큽니다. 가시리는 분지 형태를 갖추고 있어 조선 시대부터 말을 길러냈던 산마장(녹산장)과 갑마장이 설치될 정도로 목축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갑마장은 우수한 말들만을 따로 길러 조정에 진상했던 마장으로 그 흔적들이 지금의 마을 공동목장으로 남아있고, 특히 말을 마을 마스코트로 할 정도로 말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곳입니다.
처음 발걸음이 머문 곳은 ‘가시리 사무소’ 였습니다. 그 옆에는 노인복지회관과 보건소가 있고, 가시리 사무소 입구 쪽으로는 작은 도서관도 있는 나름대로 규모가 있는 행정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건물 1층에는 ‘가시리 마을 4·3센터’가 있습니다. 그곳에 방문해보고 나서야 가시리 마을은 4·3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시리 마을은 1948년 약 360여 가호가 있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지만 4·3 당시에 초토화 작전과 소개령으로 마을은 폐허가 되었고, 도피했다가 붙잡힌 사람들은 표선리 한모살과 버들못에서 총살을 당한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후 1949년 5월, 본동을 중심으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새가름, 종서물 마을은 재건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마을을 재건할 때 도움을 주신 안흥규, 안재호 선생의 동상과 공헌비를 세워 그분들의 뜻을 지금까지 기리고 있습니다.
좀 더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마을을 재건할 때 세웠던 가시리 본동 4·3성터가 나오고 그 길을 따라 더 들어가면 2001년 3월 1일 자로 폐교된 가시 초등학교가 나옵니다. 학생 수가 줄어들어 불가피하게 폐교되었지만, 지금은 미술관으로 그 역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미술관 옆으로 동네로 들어가는 길이 이어집니다. 여느 시골 마을처럼 한적한 분위기를 한껏 뽐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 멀리 견공(犬公)들이 저를 발견하고 점점 다가옵니다. 그냥 지나치겠거니 생각했지만, 여기에 처음 온 관광객들에게 마을 길을 안내해주는 여행 가이드처럼 제가 마을 한 바퀴를 돌 때까지 계속 저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혼자만의 여행을 외롭지 않게 해준 고마운 친구들입니다.
급하게 사귄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이제 발걸음을 가시리 마을 근처의 따라비 오름으로 향합니다. 북쪽에 새끼오름, 동쪽에 모지오름과 장자오름이 있고, 그중에 따라비 오름은 가장격이라 하여 ‘따애비’라 불리던 것이 ‘따래비’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지며, 화산 폭발 시 용암의 흔적이 아름다운 선을 만들어 가을이 되면 억새와 더불어 제주 오름 368개 중 가장 아름다워 ‘오름의 여왕’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억새가 우거진 광활하게 넓은 대지 위에, 오름의 정상과 맞대어져 있는 구름 사이로 내리는 빛줄기를 이정표로 삼아 정상으로 이어진 나무 계단을 밟고 힘차게 오름을 올라갑니다. 20여 분을 오르니 끝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억새가 황금 물결을 이루고 있고, 오름 뒤로는 한라산이 쑥스러운 듯 구름에 숨어있습니다.
앞으로는 저 멀리 표선 바다와 가시리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장관이 펼쳐지고. 그러한 자연의 웅장함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가지고 있는 가시리 마을. 4·3으로 좌절하지 않고 그 아픔을 딛고 다시금 일어난 가시리 마을. 완연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느끼고 싶다면 지금 가시리 마을로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