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 호근동과 서근동에 걸쳐있는 ‘하논 분화구’는 5만년이라는 신비한 자연의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이다. 특히 ‘화구의 둘레가 둥근 꼴의 작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는 화산’이라는 의미의 ‘마르형 분화구’이기도 하다. 보통 화산이나 오름이 높이 솟아있다면 마르형 분화구는 아래로 푹 꺼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하논 분화구의 경우 깊이가 7m의 습지 퇴적층이고 바닥에는 매일 용천수가 나온다. 이러한 외형적 특징 덕분에 제주에서 드물게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귀한 땅이 된 것이다.
하논 분화구는 동서 방향 1.8km, 남북 방향 1.3km에 이르는 거대한 타원모양으로 한라산 백록담보다도 더 크다. 또한 이곳은 생태계의 타임캡슐이라 불릴 정도로 5만년 동안의 지구 생명 정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처음에는 거대한 호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빙하기를 거치면서 천년에 30~40cm씩 퇴적물이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그 퇴적 기간이 약 5만년이라고 한다. 덕분에 이 기간 동안 기화변화와 생태환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게 되었고 동북아 기후 및 고생물 분석과 미래 기후 예측 연구에 최적인 장소로 지정되며 분화구 복원과 보전사업이 추진 중에 있다.
하논 분화구가 물이 빠지지 않는 퇴적층이라곤 하나 농사를 지으려면 꾸준히 용수를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곡창지 근처에 저수지가 조성되어 있고 관개수로를 정비하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하논 분화구에서 논농사가 가능해진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용천수다. 분화구 한 가운데 자리한 ‘몰망수’라 불리는 용천수에서는 하루 최대 5,000ℓ 가량의 지하수가 솟아난다. 이처럼 1년 내 마르지 않는 몰망수가 있기 때문에 하논 분화구가 제주 최대 곡창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 용천수는 별도로 조성된 인공수로를 따라 논 곳곳에 공급된다. 분화구 언덕 부근에는 작은 마을과 감귤농장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러한 환경이 조성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몰망수 덕분이다. 한편, 하논 분화구를 탐방할 수 있도록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길 따라 쭉 이어진 수로를 만날 수 있는데, 이는 약 5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곳에서 벼농사를 시작한 시점도 그 즈음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논 주변으로는 울창한 숲이 원형으로 발달해 있기 때문에 숲길을 통해 분화구 안쪽으로 이동해야 하논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하논습지안내소 밑으로 이어진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 수로를 따라 길이 다듬어져 있다. 이 길은 천주교의 순례길, 절로 가는 길, 올레길 등 다양한 이름이 붙여져 있을 만큼 걸어보길 권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논 분화구 탐방로를 조금만 걷다보면 곧 노란 황금벌판을 만날 수 있다. 워낙 제주에선 보기 힘든 풍경인 만큼 벼가 무르익는 가을에 둘러보길 권한다.